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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신문] 미혼모, 독백 편지로 무대에서 ‘美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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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312회 작성일 23-12-1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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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 독백 편지로 무대에서 ‘美치다’


- 엄마들의 찐한 고백 뮤직토크 ‘母놀로그’…진솔한 감정 전달 ‘공감’


대본 직접 쓰고 출연해 무대 위 토크쇼 진행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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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한부모가족복지상담소KUMSN, 마포구가 주최하고, KDB산업은행과 KDB나눔재단이 후원한 ‘모(母)놀로그’ 뮤직토크쇼가

               14일 시립마포청소년센터 열린공연나루에서 열리고 있다. 설동본 기자 


한부모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건 쉽지 않다. 하지만 한부모 가족이라고 해서 비난받을 일도 없다. 더욱이 그들은 우울해하고 슬픔에 빠질 일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그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놓고 아름다운 생을 영위하는 더불어 삶을 향유하도록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와 또 다른 나와의 만남, 다르지만 또 같은 이야기인 엄마들의 찐한 고백 뮤직토크 ‘母놀로그’가 지난 14일 서울시립마포청소년센터 열린공연나루에서 펼쳐졌다. 한부모가족복지상담소KUMSN, 마포구가 주최하고, KDB산업은행과 KDB나눔재단이 후원한 이번 ‘모(母)놀로그’ 뮤직토크쇼는 미혼모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들려주는 이색 프로그램이다.


특히 뮤직토크쇼 엄마들의 독백 ‘모(母)놀로그’는 미혼모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쓰고, 직접 출연해 무대에 올라 독백하는 형식의 연극으로 배우 역할을 소화하고, 공연 후 관객과 함께하는 토크쇼를 진행해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기도 했다.


채선화 한부모가족복지상담소KUMSN 소장은 “미혼한부모는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삶을 선택한 순간 세상의 편견 그리고 사회의 차갑고 삐딱한 시선과 싸우는 삶을 시작한다”며 “미혼한부모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세상의 편견과 싸우기 위해서는 사회와 나 그리고 미혼모 스스로가 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채 소장은 또 “오늘 母놀로그 무대를 통해 우리 또한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어떤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올해 엄마들의 찐한 고백 뮤직토크 ‘母놀로그’에는 미혼모인 터치, 강주현, 태양, 풀림씨등이 참여해 관객들에게 독백형식의 편지와 음악을 전달했다. ‘母놀로그’ 지도와 진행은 연극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 양은주씨가 맡았다. 본지는 이날 참석한 미혼모들의 솔직하고 찐한 편지를 소개해 독자들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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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치’의 나에게 쓰는 두 번째 편지. 설동본 기자 


# “그래, 이게 나의 최선이야”


‘터치’의 나에게 쓰는 두 번째 편지


아가, 엄마가 하고픈 말이 있어/엄마가 미안해/아가, 아빠의 존재를 감춰서 미안해/니가 한 번도 못 봤던 그 사람을/보고 싶다고 말했던 그 순간을 기억해/가끔은 노려보고/너에게 소리쳐 화냈던 못난 내 모습과/그런 상황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작은 너의 모습 지워지지가 않아/어떻게 너는 그렇게 했어/엄마가 어떤 상태더라도/넌 언제나 나를 그렇게 받아줬었지/앞으로 어떠한 상황에 놓이고/니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나도 너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어떻게 너는 그렇게 했어/엄마가 힘들어 지쳐 있을 때/넌 언제나 나를 그렇게 믿어줬었지/새로운 세상을 살아나갈 때/니가 두렵고 속상해할 때/나도 너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임신 8개월. 나는 한부모가 되었다. 어떻게든 아이 아빠와 살아보려고 살던 집과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아이 아빠의 집으로 들어갔었지. 5일 만에 그 집을 나왔고, 이후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내가 선택한 한부모의 삶이었지만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다. 많이 혼란스러웠고, 우울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미혼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차마 부모님께 알리지 못했고, 공책과 펜을 들고 주민센터, 구청, 보건소를 찾아갔는데,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지원받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적었다. 비참하도록 궁핍한 상황이었다.


우연히 검색으로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이상한 곳으로 가지 않고 잘 찾아왔다고. 공책을 들고 다니며 질문하고 받아 적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 말이 칭찬으로 들렸다. 어쩌다 미혼모가 되었냐고 질책하지 않았고, 필요한 정보와 물품 지원 그리고 미혼모의 삶을 지지받았다.


그때부터 네트워크와 인연은 계속되어 이 모놀로그도 알게 되었다. 모놀로그? 모놀로그를 시작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있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이런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거? 정말 너무 어렵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용기 내서 해 본다. 내 이야기를.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부모님께 나의 상황을 알리게 되었다. 곧 아이가 나올 때가 되니 도움이 필요했다. 만삭의 나를 낙태 시키러 병원에 데려가셨다. 당연히 안 되고... 아빠는 아이 낳고 입양 보내는 방법을 적어주셨다. 그때 나는 내 뜻대로 나를 도와주지 않는 엄마 아빠에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엄마 아빠도 미혼모가 된 딸과 그 아이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태명이 까꿍이인 우리 아이는 올해 6살이다. 말을 하게 되면서 계속 아빠를 찾는다. “내 아빠는 어딨어? 왜 우린 같이 안 살아? 보고 싶어. 아빠랑 밥 먹고 싶고, 놀고 싶고, 씻고 싶고, 자고 싶어. 우리가 데려 오자.” ‘아 왜 이리도 아빠를 찾는단 말인가.’


내가 선택한 한부모의 삶이지만 아이에게는 아빠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있고, 아이 아빠를 향한 엄청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첫 번째 모놀로그를 만들면서 많이 화내고 울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이렇게 속상하고 힘든 건! 다 너 때문이야!!”하고 책임을 떠넘기고 탓하고 싶어서 그랬다.


우리 아이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다닌다. 1년 365일 어린이집 벽에는 모든 아이들의 가족 소개판이 붙어 있다. 매해 상반기쯤 어린이집에 가족사진을 내고, 아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소개한다. 우리 아이는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과 함께 찍은 사진을 가져간다. 어린이집에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 나눠주길 부탁했다.


어린이집 다른 아이들은 내게 아이 아빠에 대해 계속 물어본다. 그래서 어린이집 모든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아이 아빠에 대해 묻거든 당황하지 말고, 얼버무리면서 이상한 분위기 만들지 말고, 언제든 나와 같이 말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까꿍이도 아빠가 있어. 근대 까꿍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랑 아빠가 회의를 했어. 따로 살기로 결정해서 지금 같이 안 사는 거야.” 처음엔 이렇게만 설명해도 “아 그렇구나”하면서 지나갔는데 지금은 “까꿍이는 아빠를 만나본 적이 있냐. 어떻게 하다가 따로 살기로 결정했냐, 집주소나 전화번호는 알고 있냐”는 등 질문이 깊어진다.


이렇게 우리 아이와 다른 아이가 내 눈치 보지 않고 언제든 아이 아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한 나를 칭찬한다. ‘그래, 이게 나의 최선이다.’ 또 최선을 찾아 헤맬 순간이 오겠지?


아이가 4살이 되던 해 구직을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많이 두려웠다. 경력단절인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혼자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갑가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나는 일을 구할 수 있을까? 4~5개월 동안 정말 치열하게 구직활동을 했다. 사람에게 크게 디었던지라 최대한 사람을 많이 안 만나는 직장을 갖고 싶었지만 그런 직장은 없었다. 보이는 대로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다 떨어졌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한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주로 어르신 돌봄을 하는 센터인데 자기돌봄이나 가족돌봄도 중요하게 여겨서 나와 아이가 아프면 뭐하냐고 빨리 퇴근하고 가보라고 먼저 말해주는 고맙고 귀한 직장이다. 벌써 3년째 안정적으로 다니고 있다.


나는 나의 진로가 고민이 되고 궁금하다. 이 나이에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법 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1년 넘게 고민하고 있는데 아직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이 모놀로그를 통해 점검하면서 답을 찾아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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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주현’의 나에게 쓰는 편지. 설동본 기자 


# 이젠 행복해도 돼


‘강주현’의 나에게 쓰는 편지


이별에 익숙해지지 않아/먼저 떠나보내곤 했던 날들/그 속에 상처를 받았던 너 이젠 안 그래도 돼/조금 행복하면 행복 속에 불안했던 너 이제는 그 행복에 익숙해도 돼/그냥 평범하게 할 수 있었던 것/다 못 누리고 살았던 것들/앞으로 하나하나 해보는 거야/널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 많아/이제는 남 눈치 보지 말고/너 하고 싶은 대로 해/네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이젠 행복해도 돼


주현아 안녕 그동안 잘 지냈니? 기억 속에도 없는 첫 번째 엄마, 정말 정을 많이 나누고 좋아했던 두 번째 엄마, 떠나가던 날 정말 슬퍼서 너무 많이 울었던 거 같아. 그리고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사람 안녕? 정말 잘못 지내고 있길 바랄게. 그리고 초등학교 때 말야 전학도 많이 다니고 많이 힘들었지?


무엇보다 급식비 지원 때문에 너무 쪽팔렸지? 그리고 새엄마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친구들이 놀려도 괜찮다 괜찮다 했었지? 안괜찮은데 참 잘 버틴거 같아. 매일 똑같은 멜빵바지 입고 학교에 가서 졸업앨범에 옷이 다 똑같잖아. 중학교때 친구들이랑 수련회 가서 장기자랑 할 거 한 달 넘게 연습했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갔던... 수련회 끝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


별로 야하지도 않은데 엄한 새어머니께서 옷도 다 찢어 놓고,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교회 가서 친구랑 피아노 치다가 늦게 들어오면 성경책, 찬송가책 다 찢어 놓고 교회 왜 가냐고 하시고 정말 속상한 적 많았던 거 같아. 나중에 늦둥이 동생 막내가 교회 갈 때는 헌금 챙겨 주는 거 보면서 정말 나한테 왜그러셨나 싶어.


고등학교 때는 가기 싫은 인문계 가서 적응도 못하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새 교복을 사주셔서 신기하기도 했지. 중학교 때는 내내 헌 교복만 사서 입었으니까. 교내 사서로 봉사 활동하면서 급식비 지원받고 결국 1학년 다니다가 그만뒀었지. 그 당시에는 학교에 가는 것이 중요한 건지는 알면서도 여러 가지 상황들이 몰리면서 가출도 하고 부모님 속도 많이 썩혔지.


담배 피지도 않는데 담배 피는 아이들과 연루되어 금연학교를 가고 이쪽도 저쪽도 어울리지 못하면서 어정쩡하게 노는 아이들과 어울려 나쁜 행동들도 하고 참 방황이 길었어. 그때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거 같아. 내 교환일기장을 몰래 보고 나를 혼내고 우리 아빠도 안때리는 싸대기를 때린 새엄마와 한시도 집에 있기 싫었던 마음에 가출도 하고 연락도 안드리고 그랬던거 같아.


나는 엄마랑 친한 친구들이 참 부러웠어. 친구처럼 말도 하고 여행도 가고 남들은 평범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는 할 수가 없었지. 방황에 시기가 정말 길었던거 같아. 스무살이 되기 전부터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고 나쁜 일들을 했었으니까.


이십대 중반까지 노래하는 가수가 꿈이었지. 그런데 오디션 현장에 가보니 정말 예쁘고 잘생기고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이 많더라. 그 현실을 깨달은 거 같아. 좋아한다고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십대 중반에 다시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하고 귀금속세공을 배워서 쥬얼리쪽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 그리고 너무 힘들었던 시기가 왔었어.


부모님과 사이도 안 좋고 남자친구도 떠나가고 직장에서도 스트레스 받고 갑자기 머리 탈모가 오더라. 안좋은 생각을 하며 소주 3병을 마시고 집에 와서 안좋은 행동을 하고 그 다음날 정말 슬펐던 아무도 내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고 다 일상에 자기들 일을 하러 갔더라고. 혼자 병원에 가기가 무서워서 집 근처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연락을 했는데 자기 생일날 자기한테 왜 이런 연락 했냐면서 날 혐오 하더라고.


난 정말 힘들어서 연락한건데 말야. 결국 혼자서 병원 가서 손목에 상처를 꼬매고 혼자 추스리고 손목에 아대라는 것을 하고 알바를 다시 나갔지. 통원치료 할 때 정말 힘들었던거 같아. 어차피 그렇게 될거 다음부턴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지.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취업을 하고 일을 하고 그러다가 정말 힘든 연애도 해 보고 약혼도 해보고 힘들게 헤어져도 보고 그 상황에 3년 동안 열심히 다닌 직장에 소개로 온 내 남동생이 피해를 준 걸 약혼남을 통해 들었을 때는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지. 그걸 당시 사장님이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나는 1년 뒤에나 알게 되었거든. 감사하기도 하고 정말 어떤 말로 표현못할 심정이었던거 같아 그때.


그리고 사랑은 정말 타이밍 같아. 내가 남에게 상처 준 만큼 그게 돌아오는거 같아. 또 힘든 시간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겠다고 정신병원도 가보고 우울증 약도 먹어보고 무속인에게도 가보고 그렇게 힘들 때 아기 아빠를 만나게 되서 힐링하고 다시 살게 되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지방으로 내려갔는데...


내가 빚도 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에게 더욱더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상대방과 연애할때는 몰랐던 폭력적인 성향과 모습 등등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모든 것들과 아이 이유식 스푼도 못사게 하고 백일사진도 못찍게 하는 상대방을 보면서... 아이들 장난감 무료나눔 해왔는데 왜 말도 없이 다녀왔냐며 뭐라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때 난 깨달았지. 내가 한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내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가 돼 주지 못할거라는 것을. 그때 7개월 아기와 둘이서 아기 돌사진은 제대로 찍어줘야지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와 시설로 들어갔지.


친구와 지인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그때 용기내서 행동하지 못했다면 넌 거기서 어떻게 지냈을까. 아마 그런데 내 생각에 시간이 뒤로 지날 뿐이지... 더 흘렀을 뿐이지 더 그곳에 있었을 거 같진 않아. 아무튼 그때 너의 선택은 현명했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책임질 행동들이 늘어가는데 힘든 연애를 하고 있을 때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도 준적도 있었지만 너가 아이와 같이 혼자 살 생각으로 서울에 온 것은 정말 잘한 선택같아 칭찬해. 앞으로도 선택 잘하길 바랄게. 뭐 설사 너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이젠 더 어릴 때의 너가 아니니까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만 항상 널 응원 할게.


그리고 이젠 남 눈치 보지 말자. 예전보단 덜 보지만 앞으로도 보지 말자. 남이 너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은 아니니까. 너가 제일 소중하다고 말해주고 싶어. 너보다 중요한건 없어.


이별에 익숙해 지지 않아 떠나려는 사람들은 방어를 하고 먼저 떠나 보내고 했던 날들. 그 속에 상처받은 주현아, 이제 안그래도 돼. 너 원래 되게 밝은 아이잖아. 니 곁에 이제 너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까 남 눈치 보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자 주현아.


이제 빚도 다 갚고 하고 싶은 일들도 할 수 있고 아기에게 해주고 싶은 것도 하고 살면서 아주 행복한데 행복 속에 또 불안한 너 이젠 행복에 익숙해 지자! 남들은 그냥 평범하게 할 수 있었던 것들 다 못 누리고 살았던 것들 앞으로 하나하나 하는 거야. 너가 어떤 선택을 하던 난 널 항상 응원할 게. 강주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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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양’의 나에게 쓰는 편지. 설동본 기자 


# “아이는 이제 나의 빛이 되었다”


‘태양’의 나에게 쓰는 편지


행복할 거라고/생각한 나의 생각/모든 게 착각이었고/그의 모든 것은 거짓말/나는 엄마가 될 수 없을 거라고/하지만 마흔살 아이를 낳고/그 아이는 나의 빛이 되었지/나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지


29살 첫 남자를 만나 결혼식까지 올리고 동거를 시작했지. 나만 바라봐주는 한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고, 나 없으면 죽어버린다는 그 말을 진실이라 믿었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 나의 생각은 모든 게 착각이었고, 그의 모든 것은 거짓이었지. 그와 함께 살며 두 번의 임신과 두 번의 자연 유산으로 나는 엄마가 될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고, 그 시간은 나에게 지옥이었지. 세월이 흘러 다시 한 남자를 만나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 되었고 나는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지.


오직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수가 있을까? 또 다시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들로 아이가 뱃속에서 크고 막달이 되었을 때까지도 ‘갑자기 아이가 사라지는 거 아니야’ ‘아기야 잘 있니’ 하고 물어보며 혼자 병원에 갈 때마다 가슴을 졸였다. 하루하루 걱정 속에 아이는 세상에 태어났고, 나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지.


태어난 이후의 육아는 생각해보지 않았고, 아이와 단 둘이 방 안에 있는데 분유도 기저귀도 아이를 안는 법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도움 받을 곳도 없고 앞이 캄캄해서 아이 낳기 하루 전날까지 하던 좋아하는 일과 내가 계획해 놓은 모든 것들을 아이가 내 귓가에서 울부짖는 소리에, 내가 내 일을 하면서 혼자서는 둘 다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일을 포기하고 아이를 선택하며 아이 말고는 모두 내려놓고 오직 육아에 전념했는데도 나는 너무나 외롭고 힘이 들었다.


나의 무지 속에서 아이는 예민하고 짜증도 많이 냈고, 아이가 밤에 자다가 갑자기 토하거나 열이 나면 혼자 쩔쩔매며 울기도 많이 했지. 매일매일 무너지는 나의 삶 속에서 나는 점차 하나하나 나의 것을 내려놓으며 한 아이의 엄마로 변했다.


지금은 힘은 들지만 아이가 내 곁에서 크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한 해 한 해 아이에 대한 사랑이 더 커지고 너무 예뻐서 지금은 아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온전히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고 아이가 주는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아이는 이제 나의 빛이 되었다.


아들이 나의 빛이 된 것처럼 이 아이도 어른이 되어서 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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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림’의 보보에게 쓰는 편지. 설동본 기자


# “엄마 사랑해 엄마 최고야 엄마 힘내”


‘풀림’의 보보에게 쓰는 편지


달라지고 있어 내 선택이/달라지고 있어 나의 삶도/어떻게든 살 거란 생각만/설명할 길 없는 이 허전함/달라지고 있어 나의 의지/달라지고 있어 나의 미래/감당할 수 없었던 상황들/보이지 않던 우리의 내일/나의 손을 잡아줄래/우리 함께 날아갈까/하나보다 우리같이 행복하게 가자


마라톤! 사람들이 긴 마라톤에 인생을 비유하곤 하더라. 열심히 달리고, 숨은 헉헉거리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데, 옆에 같이 달리는 사람들이 있어.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 나에게 상처주는 사람도 있고, 잘 뛴다고 소리질러 주는 사람도 있어. 나는 마라톤에 참가했을 뿐인데, 물도 주고 빵도 주고 어느새 금메달도 손에 들고 있더라.


보보야 엄마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너와 함께 결승점까지 오게 되었어. 너가 양증맞은 손으로 손하트 날려주면서 ‘엄마 사랑해’ 하는 소릴 들으니까 숨이 턱턱 막히고,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데도 웃음이 난다? 당장 주저앉아 ‘안해’하며 포기하고 싶었는데, 너가 결승점 넘어에서 나를 응원하고 있어 고작 6살인 너가.


보보 너가 없이 내가 어찌 살았을까. 너가 오던 그 더운 날 찜통같은 작은 방에 당장 쓸 짐 빼고 다 내다 버렸지. 애기방은 걸리는 게 있으면 안된다구해서. 이제는 네가 지구가 아프니까 분리수거, 전기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고 엄마를 혼냈지? 엄마가 다 기억할게.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들이야.


도움을 요청하러 가서는 배부른 엄마한테 ‘사지육신 멀쩡한데 일하세요’라고 말하는 장얘우 공무원, 집주인 할아버지가 보증금 안 주려고 소리 지르고 엄마를 쳐서 경찰까지 부른 사건들. 다시 우울해질까봐 기억하기도 싫던 따돌림들. 미혼모지만 지원받을 수 없는 서류상의 규제들. 부당한 대우들. 그 사람들도 힘들었겠지? 이래야 한다고 따지는 엄마...


엄마들 사이에서 치열했던 지원 경쟁. 서로 경쟁에서 이겨내려고 했던 무지함들. 너는 못키운다 입양보내라고 했던 믿었던 사람의 권유, 무엇보다 아팠던 엄마의 엄마가 했던 행동들. 우리가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몰라.


지원받고 너랑 살고 싶어서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이 없는데 또 왔다고 부모랑 같이 살고 지인이 도와주는 사람들은 엄마의 열심을 쑤근거리더라. 너를 만나기전 죽음에서 겨우 살아났는데 그 심정을 몰라줘. 말해도 이해를 못해. 자기들끼리 모른척하며 웃더라. 엄마가 쪼잔했지? 나도 힘들땐 작아지더라.


말로하기도 벅찼던 그날들 중에는 우리를 도와준 손길도 있어. 한여름도 아닌 6월의 실내온도 40도가 웬말이니? 믿을수가 없었어. 그 방에서 선풍기 하나 없이 지날 때, 주말에도 찾아와서 선풍기 조립해 주고, 미역국 끓여주고, 방 하나 있는 집으로 이사 가게 도와주신 분도 있지. 그 덕에 쟁이 이모도 만나고, 이젠 매일 이모랑 행복하게 웃잖아.


노인대학에서 봉사로 수업할 동안 너는 이모한테 업혀서 홍제동을 누비고 다녔지? 길에서도 천원씩 받아오면 엄마가 감사하다고 기도 했잖아. 그때는 속으로 이런 기도도 했어.


“제발 저희를 모르고 욕하는 사람들이 사실대로만 얘기하게 도와주세요. 저는 부도덕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그저 나에게 온 선물을 잘 보호하려는 거예요. 지금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돕고 살면서 내 아이 건강하게 책임지면서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기도만으로 부족했지. 엄마는 수행도 열심히 했어. 마음을 비우고, 비난을 바람소리처럼 듣고, 상대도 아프니까 못난 말을 하는구나 저 사람도 나만큼 아팠구나 하고.


엄마는 결국 너만 봤어. 결승점 뒤에서 나에게 소리치고 손하트 날리면서 ‘엄마 파이팅, 엄마 사랑해. 엄마 최고야, 엄마 힘내’ 입은 마르고 다리는 후들거리는데 멈춰 설 수가 없어. ‘너는 왜 그러냐, 너 이상해, 문제가 있어’ 하는 태도들이 엄마를 괴롭게 하지만 하나도 안들려 신기하지? 너만 보여.


활짝 웃고 내 품에 쏙 안기며 “미안하지만 엄마 눈부시니까 불 좀 꺼줄래요?” 고작 6살짜리가 정중하게 요청을 하니 엄마는 깜짝 놀랐어! 매일 떼쓰고 짜증내고 말을 안해서 언어치료까지 받았는데 엄마가 말을 안하니 그랬던가 봐.


이제는 너가 “나는 소중하니까 만지지 마세요”라고 할 때는 너가 사라질까 눈을 못 돌리겠어. 그래도 아직 남은 손가락! 피가 나도록 찔러대는 너의 엄지손가락을 보면 엄마는 억장이 무너져. 너를 잘못키우는 것 같아서. 엄마가 무섭게 해서 그런걸까 봐. 밖에서 욕 먹는게 싫어서 그랬는데. 미안해.


설동본 기자

출처: 시민사회신문 /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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